디자이너로 블럭스(Blux)에 처음 합류했을 때 제품은 이미 잘 작동하고 있었고 고객사들도 실제로 잘 사용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블럭스는 디자인적으로 어떤 브랜드인가요?’라는 질문에는 누구도 선뜻 답하지 못했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형태나 스타일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디자인 철학을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그 지점에서 블럭스의 디자인 철학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고 느꼈고, 단순히 겉모습을 정돈하는 것을 넘어 블럭스다운 디자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가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디자인 철학은 단순한 ‘룩앤필(Look and Feel, 서비스의 외형과 사용자가 느끼는 분위기)’이 아니라 기술과 경험이 만나는 방식의 ‘결’입니다. 그리고 그 결을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을 기준으로 설계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지난 몇 개월 동안 팀원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이제는 블럭스다움을 설명할 수 있는 디자인 철학을 함께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디자인 철학을 정의한 과정을 통해 브랜드의 방향성과 제품 경험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디자인이 제품보다 뒤에 있을 수는 없다
저희가 서비스하는 ‘블럭스 메시지(Blux Message)’는 AI 기반 초개인화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이라는 강력한 가능성을 지닌 제품입니다. 제가 합류했을 당시에도 블럭스는 차별화된 기능을 끊임없이 개발하며, 마케터의 새로운 업무 경험을 만들어가기 위해 쉼 없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부 콘솔을 살펴보면서 느낀 건 이러한 혁신적인 방향성과 디자인 사이에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기능의 흐름과 정보 구조는 다소 복잡했고, 디자인은 블럭스가 지향하는 기술적 가치나 속도감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디자인이 단순히 기능을 보완하는 역할을 넘어서 브랜드의 비전을 실제 경험으로 풀어내는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블럭스다움’을 정의하는 디자인 원칙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내부에서 찾은 첫 단서
디자인 원칙 정립은 사용자 조사나 외부 벤치마크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블럭스 내부에서 제품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팀원들이었습니다.
기획자, 개발자, 세일즈 등 서로 다른 역할의 팀원들이 블럭스 콘솔을 사용하며 실제로 겪는 혼란과 인식을 수집하기 위해 설문을 진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의 블럭스는 사용자에게 어떤 이미지일까요?”
“어떤 부분이 혼란스럽고, 어떤 부분이 좋다고 느끼시나요?”
“기능성, 직관성, 효율성, 가독성, 친숙함, 심미성 등 6가지를 중심으로 평가할 수 있나요?”
그리고 설문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래였습니다.
“블럭스다움이란 무엇이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블럭스다움은 무엇인가요?”
바쁜 와중에도 블럭스 팀원 대부분이 설문에 응답해 주었고, 다양한 역할과 관점에서 솔직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성적 피드백과 수치 데이터를 함께 분석한 결과, 반복적으로 등장한 키워드는 명확했습니다.
처음 쓰는 사람이 혼란스러워한다.
기능이 복잡하고, 필요한 정보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입력 흐름과 정보 구조가 일관되지 않는다.
디자인은 깔끔하지만, 블럭스라는 브랜드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긍정적인 피드백도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구조, 통일감 있는 톤앤매너, 깔끔한 색상 사용 등은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장점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반복적으로 지적된 문제를 해결하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더 분명히 드러낼 수 있도록 디자인 원칙을 정리해 나갔습니다.
원칙은 선언이 아니라, 설계를 위한 기준이다
문제를 정리한 뒤 도달한 결론은 단순한 ‘개선 리스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기능을 우선 배치할 것인가?’
‘어떤 인터랙션이 더 적절한가?’
‘어떤 메시지 톤이 블럭스다운가?’
이 모든 질문에 일관된 기준으로 답하기 위해서는 디자인 원칙이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실제 설계와 실행을 이끄는 기준이어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블럭스가 지향하는 기술 방향성, 그리고 사용자 경험 사이의 균형을 고려해 다음 네 가지 디자인 원칙을 도출하게 되었습니다.
(1) 보이지 않는 기술을 신뢰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Trustworthy)
블럭스는 AI 기반 CRM으로서 사용자에게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경험을 제공해야 합니다. 또한, 기술의 원리와 결과가 설명 가능하고, 데이터 흐름이 명확히 드러나며, 작은 인터랙션 하나에도 신뢰가 느껴져야 합니다. 특히 UI와 UX는 사용자의 의심을 줄이고 확신을 주는 장치가 되어야 합니다.
(2) 익숙한 패턴을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Innovative)
블럭스는 CRM의 기존 관행을 따르지 않습니다. AI와 자동화를 통해 이전에는 없던 워크플로우를 제안하고, 복잡한 설정 없이도 성과를 낼 수 있는 사용자 경험을 설계합니다. 단순히 새로워 보이기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실질적인 효율과 도약을 가능하게 하는 UX를 목표로 합니다.
(3)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UX로 사용자의 몰입을 유지한다. (Seamless)
불필요한 클릭, 반복 입력, 혼란스러운 전환은 설계에서 배제합니다. 또한, 온보딩, 설정, 분석, 피드백에 이르기까지, 제품 안에서 하나의 연결된 사용자 여정을 설계합니다. 무엇보다 UX는 기능을 나열하는 구조가 아니라 흐름을 조직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4) 모든 기능과 표현은 사용자의 필요와 관점에서 출발한다. (User-Centered)
블럭스가 구현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을 담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어떤 목적과 맥락에서 이 화면에 도달했는지를 중심으로 설계합니다. 기술적 완성도보다 중요한 것은 사용자가 느끼는 직관성과 편리함, 그리고 비즈니스 목표와 사용자 만족 간의 균형입니다. AI는 스스로 작동하는 기능이 아니라 사용자의 판단을 돕는 조력자로 작동해야 합니다.
블럭스다운 디자인을 완성하는 과정
블럭스의 디자인 원칙은 저 혼자 만든 결과물이 아닙니다. 같은 제품을 바라보며 느낀 불편과 기대, 그리고 ‘블럭스다움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함께 나눈 피드백과 통찰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블럭스 디자인 원칙은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지시하는 규칙이 아니라 더 나은 설계를 위해 함께 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의 언어입니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기획, 개발, 세일즈 등 모든 접점에서 ‘왜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공유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블럭스다움을 만들어가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원칙들은 아직 완성형이 아닙니다.
제품이 깊어지고, 고객이 늘어나고, 문제와 기회가 바뀔수록 우리는 이 기준들을 함께 재해석하고 더 정교하게 다듬어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우리에겐 같은 기준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쌓여갈 블럭스의 사용자 경험은 기능 하나, 단어 하나, 흐름 하나에 담긴 수많은 결정들의 집합일 것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이 네 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기술의 가치를 가장 블럭스답게 전달하는 경험을 함께 만들어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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